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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

장윤창 별세 배구선수 아들 사망 나이 아내

by 좋은사람킴 2025. 5. 31.

안타깝게도 장윤창님의 별세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 배구선수 장윤창 별세 소식과 관련된 정보를 총 정리하여 상세하게 소개해 드립니다.

 

장윤창 별세
장윤창 별세

 

장윤창은 대한민국의 배구인으로, 1960년 9월 10일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송산중학교와 인창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대학교 예체능대학에서 체육학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학 석사,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1983년부터 1994년까지 고려증권 배구단 소속 선수로 활약했으며, 주 포지션은 세터와 아포짓 스파이커였습니다. 뛰어난 기량과 헌신적인 자세로 팀에 큰 기여를 하였고, 은퇴 후에는 경기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또한 프로배구 KOVO의 경기감독관으로 활동했으나, 오심 논란을 계기로 2010년을 끝으로 해당 직책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195cm의 신장을 지닌 장신의 선수였으며, 개인적으로는 배우자 이성희 씨와의 사이에서 장남 장대한 씨와 차남 장민국 씨를 두었습니다.

 

 

장윤창은 오랜 시간 대한민국 배구 발전을 위해 헌신했으며, 2025년 5월 30일 향년 64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이는 아래에서 자세히 소개합니다.

 

 

장윤창 교수의 아내는 이성희 씨입니다. 두 사람의 결혼 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공개된 정보는 없으나, 장윤창 교수는 배우자 이성희 씨와 함께 가정을 이루었으며, 슬하에 두 아들 장대한, 장민국을 두고 있습니다. 아들 장민국은 프로농구 선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차남인 장민국 님이 농구 선수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장민국 님은 아버지보다 3.6cm 큰 198.6cm의 포워드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2012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0순위로 전주 KCC에 지명되었습니다.

 

장민국 님보다 3년 위인 맏아들 장대한 님 또한 농구를 했으나, 성균관대학교 재학 중 군에 입대하며 선수 생활을 접었습니다.

 

 

전역 후 프로골퍼를 지향하며 골프장에서 일과 연습을 병행하던 중, 2013년 9월 3일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윤창 님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새누리당 신영수 후보를 지지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보수 정당 지지자로 추정됩니다. 20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 대해 긍정적인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장윤창 선수는 배구를 시작할 때는 세터였으나, 뛰어난 왼손잡이 특성을 활용해 라이트 포지션의 공격수로 전향했습니다. 인창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국가대표에 발탁될 정도로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놀라웠습니다.

 

 

특히 18세의 어린 나이였던 1978년에는 강만수, 김호철, 강두태, 정강섭, 이인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함께 주전으로 활약하며 한국 배구 역사상 최고의 성적인 세계 선수권 4강 진출을 이뤄냈습니다.

 

이러한 쾌거를 바탕으로 남자 배구의 실업리그화를 이끄는 선봉장 역할을 했습니다. 1984년에 개최된 제1회 대통령배 배구대회에서 인기선수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대회가 거듭될수록 MVP와 베스트 6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며 화려한 기록들을 세웠습니다.

 

 

덕분에 1980년대 초중반부터 배구를 시청했던 팬들에게는 해외 진출로 국내에서 볼 수 없었던 선배들 대신 최고의 공격수이자 세계적인 선수였던 장윤창 선수가 배구의 대명사로 각인될 정도였습니다.

 

이는 당시 한국 최고 선수였던 김호철 선수가 유럽에 진출했고, 아시아의 거포 강만수 선수는 장윤창 선수보다 활동 시기가 조금 앞서 현재 팬들에게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윤창 선수는 뛰어난 자기관리로 34세의 나이인 1994년까지도 선수로 활약하여 오랫동안 한국 배구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의 놀라운 체공력으로 어택 라인 밖에서 점프하며 몸을 뒤로 젖히는 백어택은 보는 이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그가 '돌고래'라는 애칭을 얻고 후대에까지 회자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김세진 선수와 박철우 선수가 그의 뒤를 잇는 선수로 평가되지만, 배구 팬들 사이에서는 장윤창 선수의 아성과 국제 무대에서의 성과가 워낙 높아 대부분의 경우 이들이 성적이나 선수 능력, 테크닉 면에서 장윤창 선수보다 다소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김세진 선수가 월드리그 6강 진출 시 에이스로 활약하고 국내 대회에서 많은 MVP를 수상했지만, 소속팀의 압도적인 독주 때문에 그 가치를 온전히 인정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우세합니다. 반면 장윤창 선수는 소속팀인 고려증권의 선수층이 약하고 신인 선수 수급이 어려웠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끈끈한 노력으로 팀워크를 다지며 지나친 독주 없이 꾸준히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장윤창 선수는 현재는 보편화된 스파이크 서브의 실질적인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이전까지 세계 최초의 스파이크 서브는 1978년경 한 중국 선수가 시도한 것이고 현재보다 위력이 약하며 간헐적으로 시도되는 수준이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1981년 캐나다의 존 배럿 선수가 이를 보고 현재와 같은 형태로 발전시켜 매 게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스파이크 서브가 일반화된 것은 1984년 올림픽에서 브라질 팀이 사용하고 나서부터라는 내용이 통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윤창 선수는 1984년보다 앞선 경기대 재학 시절인 1979년부터 이미 국가대항전에서도 강력한 무기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완성도 높은 스파이크 서브 즉 당시 '스카이 서브'라고 불리던 것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습니다.

 

 

1982년 한일 남자배구 정기전 영상에서 당시 경기대 4학년이던 장윤창 선수가 경기 시작과 동시에 매우 완성도 높은 강력한 스파이크 서브를 실전에서, 그것도 민감한 한일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파이크 서브의 위력과 정확도, 그리고 연속으로 구사하고도 위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 장면을 보면 이미 충분한 시간과 연습을 통해 완성된 개인 전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을 고려할 때, 장윤창 선수가 스파이크 서브를 구사한 것이 단기간의 연습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 충분히 확인되며, 기존에 캐나다의 존 배럿 선수가 최초라고 주장하며 제시된 내용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이나 세계 선수권이 아닌 이상 국제 교류의 기회가 적었고 각국 리그를 통해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에, 1978년쯤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점프 서브가 스파이크 서브 형태로 완성되어 A클래스 경기에 사용된 시기는 누가 원조냐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은 스파이크 서브를 구사하지 못하면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지 못하는 선수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스파이크 서브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서브 제한 규정도 지금보다 훨씬 까다로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장윤창 선수의 스파이크 서브는 매우 빠른 속도로 상대 코트에 작렬하여 무시무시한 공격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요즘 선수들의 스파이크 서브가 빠르고 받기 어렵다 해도, 1982년도 기준으로 기압 높은 공을 사용했던 당시의 스파이크 서브 실제 구속이 훨씬 빨랐습니다.

 

 

구속이 빨라 받는 것이 더욱 어려웠고, 기술적으로 완성된 1990년대 초 남자 배구 국제 경기를 보면 경기가 서브 공방전으로만 흘러가자 공기압을 낮추게 되었습니다. 대신 공에 딤플을 많이 넣어 변화를 많이 받게 하여 받기 어려운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의 재능은 어느 팀이라도 탐낼 만했습니다.

 

 

사실 그가 고려증권에 입단하기 전부터 중동에서 영입 제안이 들어올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으나, 정작 배구협회 등 관련 기관에서는 본인에게 이를 알리지 않은 채 병역 의무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막아버렸습니다. 이는 당시 한국 배구가 1978년 이탈리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4위를 차지한 후 주축 멤버들이 줄줄이 해외로 진출하게 되면서 위기 의식을 느낀 관계자들이 이를 막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당시 같은 팀의 세터이자 전 경기대 배구부 감독인 이경석 선수와는 1년 후배이지만 사실은 동갑이며, 이경석 선수가 고등학교에서 유급하여 1년 늦게 진학하면서 후배가 된 것일 뿐이라 이미 10여 년 전부터 서로 말을 놓고 지냈다고 합니다.

 

 

1994년 현역에서 은퇴한 장윤창 님은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했습니다. 한때 친정팀인 고려증권의 코치로도 활동했으며, 이후 논산에서 볼링장을 운영하는 등 개인 사업을 했으나 과감히 접고 모교인 경기대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유명 스포츠 스타답게 다른 종목의 은퇴 선수들과 함께 봉사활동 단체를 조직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최근까지 대한민국 스포츠 국가대표 선수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장윤창 님은 현역 시절 술과 담배를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장윤창 경기대학교 스포츠과학부 교수는 2025년 5월 30일 오전 오랜 투병 끝에 별세했습니다. 향년 65세입니다. 장윤창 교수는 2024년 말 위암 진단을 받고 자택에서 투병해왔으며,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멋진 플레이는 대중들에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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