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식은 한국적인 감성과 독특한 가창력으로 사랑받는 대한민국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입니다. 그는 전성기 시절 뛰어난 음악적 역량을 바탕으로 시대를 초월하는 명곡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송창식 가수의 프로필과 그와 관련된 여러가지 정보를 총 정리하여 소개해 드립니다.
1. 송창식 나이 프로필 부인
송창식 가수는 1947년 2월 22일 1남 1녀 중 장남으로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진천 송씨입니다.
경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6.25 전쟁 중 전사했고, 어머니는 가출하여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뛰어났으며, 중학교 시절에는 경기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기도 했습니다.
서울예술고등학교 성악과에 수석 입학했지만, 가난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그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고, AFKN 흑인 아마추어들의 블루스 경연대회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 더욱 음악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2024년 기준으로 77세의 나이가 되었으며 현재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소 생활한복을 즐겨 입고 기타를 메고 다니는 모습으로 친숙하며, 밝은 미소와 낙천적인 성격으로 기인이나 도인 같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는 1975년 홍콩에서 열린 국제 아마추어 가요 대회에서 양복을 입고 참가했다가 어색함을 느껴 이후로는 한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음악적 재능뿐만 아니라 독특한 개성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한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송창식의 아내분은 서울예술고등학교 동기인 한성숙 씨입니다.
졸업 후 각자 다른 길을 걷던 두 사람은 동창회에서 재회하여 결혼에 이르렀습니다. 한성숙 씨는 송창식의 명곡 '사랑이야'의 작사가이기도 합니다.
송창식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으며, 첫째 아들만 친자식이고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은 입양한 자녀입니다. 입양한 자녀들은 모두 처형과 관련이 있으며, 가족 간의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송창식은 컴퓨터를 6대나 사용하는 등 기술에도 관심이 많으며, 그의 아들 송결은 엔씨소프트 게임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머리라는 사실이 알려져 팬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과거 사진 속의 풍성한 머리카락은 가발이었으며,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에는 탈모된 모습으로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송창식은 바둑과 그림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마 3단의 바둑 실력을 자랑합니다. 또한 클래식을 전공한 그는 기타 반주 곡들을 주로 피아노로 작곡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초기에는 번안곡 가수로 활동했지만, 김민기의 앨범 '아하 누가 그렇게'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아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2. 송창식 데뷔 활동 평가 재산
송창식은 1967년 윤형주와 함께 트윈폴리오를 결성하여 '하얀 손수건'으로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
이후 솔로 가수로 전향하여 '창밖에는 비 오고요', '피리 부는 사나이', '한 번쯤', '고래사냥', '왜 불러'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1970년대 가요계를 평정했습니다.
특히 '고래사냥'은 1975년 발표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며 각종 가요 부문 상을 휩쓸었습니다. 그는 MBC 10대 가수상을 3년 연속 수상하는 등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1978년에는 일본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습니다.
이후 '사랑이야', '토함산', '나의 기타 이야기' 등의 곡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80년대에는 '가나다라'를 통해 가요에 국악을 접목하는 시도를 했으며 1986년 '참새의 하루'와 '담배가게 아가씨'를 발표한 이후에는 신곡 발표 없이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송창식은 위에 언급된 곡 외에도 '상아의 노래', '내 나라 내 겨레', '밤눈', '맨 처음 고백', '딩동댕 지난 여름', '우리는'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습니다.
또한 '가위 바위 보', '병사의 향수', '새는', '푸르른 날' 등 명곡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2015년 제12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공로상을 수상하며 한국 대중음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송창식은 방송 프로그램 '놀러와 세시봉 특집'에 출연하여 변함없는 가창력을 선보이며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그는 CM송 '빙그레 투게더'와 '참붕어빵'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노래 대부분은 직접 작사, 작곡한 것으로,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 가요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당시 음악계에서 송창식의 천재성은 널리 인정받았으며, 특히 자존심 강한 세시봉 멤버들조차 그의 재능을 극찬했습니다.
그는 대중적인 인기와 예술적 가치를 모두 만족시키는 곡들을 만들었으며, 시적인 감성과 아름다운 선율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뛰어난 가창력 또한 갖추고 있어, 보고 듣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현대 음악 시장에서도 여전히 존경받는 가객이자 예술가로 남아 있습니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송창식을 가왕 조용필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가수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히트곡과 맑고 힘 있는 가창력으로 1970년대 한국 포크락을 이끌었습니다.
양희은, 어니언스 등과 함께 세시봉-청개구리 시절부터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아마추어 티를 완전히 벗어던진 가수로 평가받습니다.
송창식은 독특한 감성과 노래 가사에 어울리는 애드립, 그리고 클래식 전공자다운 엄청난 성량을 자랑합니다.
초기에는 정확한 음정과 발음으로 부드러운 미성을 선보였지만, 트윈폴리오 활동 후반부터는 자신만의 독특한 창법을 개발했습니다.
그는 가사를 발음하기보다 어울리는 소리를 내고 거기에 가사를 맞추는 방식으로, 마치 해탈한 도인처럼 너털웃음을 짓는 듯한 느낌을 주는 창법을 완성했습니다.
그의 노래는 듣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따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송창식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다른 사람이 흉내 내기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독보적입니다.
음악으로 득도한 천재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그의 음악적 역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심지어 막말도 잘하고 노래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조영남조차 송창식의 노래에 대해서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송창식은 윤형주의 엘리트 이미지와는 달리 서민적인 이미지로 대중에게 다가갔습니다. 윤형주가 대중친화적인 팝 음악을 선보였다면, 송창식은 독특한 음색과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창조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가창력뿐만 아니라 기타 실력 또한 훌륭합니다. 세시봉 멤버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그의 기타 연주 실력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송창식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사람 좋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이어가며 한국 가요계의 거장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송창식 님의 정확한 재산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보증 문제 등으로 재산상 손실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현재는 저작권료 등으로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생활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방송에서 송창식 님은 저작권료 수입이 연간 1억 원 정도이며, 사후 50년까지 저작권료를 받을 수 있고 직계가족에게 상속도 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따라서 송창식 님의 재산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저작권료 수입과 기타 활동 등을 고려하면 상당한 규모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송창식 가수는 현재 미사리에 위치한 '쏭아 라이브 카페'에서 꾸준히 공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카페 이름은 그의 젊은 시절 별명에서 따온 것이며, 건물도 직접 설계했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화제의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승수 배우 결혼 아버지 나이 프로필 연인 재산 자녀 (0) | 2024.06.19 |
---|---|
양정아 프로필 나이 결혼 전 남편 자녀 아들 탤런트 총 정리 (0) | 2024.06.19 |
박서진 나이 노래모음 엄마 형 가족 동생 고향 학력 장구 프로필 (0) | 2024.06.18 |
백종원 소유진 나이 프로필 자녀 인스타그램 총 정리 (0) | 2024.06.18 |
최진혁 프로필 나이 엄마 고향 학력 아버지 가족 드라마 (0) | 2024.06.16 |